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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세탁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2016. 9. 16. 09:45
대부분의 평민들이 족보를 사서 신분을 세탁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그들 가운데 정작 자기 가문이 그런 부류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구태여 하지 않는다. 조선 초기에 인구 중 양반의 비율이 10 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가면서 군역을 피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족보를 사거나 만들었을 것이다. 족보가 1500년대 이후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니,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것과 같은 날조가 흔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모든 사람들이 성씨와 족보를 갖게 되었다고 하니, 양반 가문임을 입증하기 위해 유교 문화가 갈수록 더 팽배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추석에 내려가면서 우리 집안이 양반 가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우리 집안은 본관으로 삼는 고장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산골 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다른 군이나 면에서 사는 사람들은 드물었는데, 그들은 모두 내 고향 마을에서 살다가 옮긴 친척들이었다. 쉽게 말해 내가 만난 동본은 모두 내가 아는 또는 나의 아버지가 아는 친척이었다. 결국 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홀로 충주에 왔다는 것인데, 관직을 받아 온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다른 좋은 마을들을 두고 그렇게 궁벽한 곳에 자리를 잡았을 리 없다. 관직이 아니라면 유배인데, 왕족이나 세도가의 일시적 체류지라면 모를까, 충주가 보통 벼슬아치들을 위한 유배지로 사용되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유배지로 삼기에 서울에서 너무 가깝다. 국가에 큰 죄를 짓고 도망하였나? 그렇다면 더 멀리 남도로 가야 하지 않았을까?
둘째, 양반 가문임을 나타낼 만한 유물이 없다. 우리 파의 시조는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벼슬을 지낸 문신인데, 그렇다면 그 후손들도 벼슬길에 오르려 시도했을 것이다. 공부에 사용한 서책이나 벼슬을 하면서 쓰거나 갖게 된 물건들이 적지 않을 터인데, 나는 그런 것이 있다는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했고, 어르신들 중에 한문을 깊이 익힌 사람이 있다는 얘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독립 운동가들도 아니었고.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우리 집안이 족보를 갖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만약 19 세기 이전에 양반이 되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제적 또는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갖추었을 텐데, 우리 집안이 과거에 엄청난 거부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인근에 있는 다른 산골 마을들이 다 우리 땅이었다고 해도 거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헛된 믿음을 사실로 만들자면, 그랜드 캐년이 노아의 방주 때 형성되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론을 만드는 것처럼, 그럴 듯한 가정을 끊임없이 덧붙이는 소용없는 수고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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