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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테크니컬 라이팅 2015. 6. 12. 11:11
표준: 사물의 정도나 성격 따위를 알기 위한 근거나 기준.
standard: a required or agreed level of quality or attainment.
진시황이 최초의 표준 창시자가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가 "도량형을 통일했다"고 짤막하게 소개한다. 앞뒤 얘기 (이유, 목적, 결과 따위) 없이 그런 식으로 얘기하니 역사가 지루한 과목이 될 수밖에 없다. 앞뒤 얘기를 붙여보자. (이 이야기의 정확도를 장담할 수 없다.)
진시황은 모든 영토를 직접 다스리기를 원했다. 그가 선발한 관리를 지방으로 내려보내 통치하게 했다. 땅이 넓고 사진기가 없으니, 그 관리가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신표를 나눠 갖게 했다. 반란에 대비하여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여차하면 바로 달려가서 제압할 작정이었다. 땅을 두들겨 풀이 나지 않을 만큼 길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 길의 흔적을 지금도 비행기에서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전쟁에서 군수가 아주 중요하다. 차륜 거리(수레에서 바퀴와 바퀴 사이의 거리)를 통일했다. 그 고속도로의 폭이 차륜 거리가 통일된 수레가 불편없이 통행할 수 있는 정도이다. 차륜 거리는 중요하다. 남과 북이 통일되면 기차를 타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는 여행이 가능할 것 같은데, 기차를 갈아타야 할 것이다. 나라마다 기차의 차륜 거리가 다르다고 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직접 통치를 포기하고 봉건제를 채택했다면 그 왕조가 좀 더 오래 가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표준이란 권장이지 절대선이 아니다. 표준들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일뿐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표준을 절대 진리처럼 취급한다. "표준" 앞에 붙는 것의 규모가 클수록 그 권위도 높아진다. "국제 표준"이 제일 위대하다 하겠다. 표준이 일상의 다툼에서 공격의 수단으로도 그 반대로도 사용될 수 있다. "너가 만든 것은 XX 표준을 충족하지 못해 그러니 불완전해", 또는 "XX 표준에 따라 했어. 그러니 나는 할 만큼 했어." 좀비들 같다. 이런 다툼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권위주의적인지 보여준다.
ISO/IEC 82079-1이란 것이 있다. Preparation of instructions for use---Structuring, content and presentation. 소위 매뉴얼 표준이다. (실은 매뉴얼을 포함하는 모든 사용 정보에 대한 표준이다.) 이 표준이 좋은 얘기 많이 한다. 색맹 같은 시각 장애인을 고려하라, 환경을 고려하라, 안전과 관련된 경고를 두드러져야 한다 등등. 하지만 테크니컬 라이터가 이 표준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도움이나 유익함은 거의 전혀 없다. 문서를 만드는 일에는 어휘, 어법, 시각 자료, 타이포그래피 등 여러 지식과 기술이 동원된다. 82079 표준은 고작 어떤 정보들이 다루어져야 하고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기초적인 (그리고 상당히 추상적인) 지침들만을 제공할 뿐이다. 어떤 문서가 이 표준에 따라 만들어졌을 때 이 표준이 그 문서에 기여한 정도는 1 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표준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표준 하나가 전부일 수 없고 절대선일 수도 없다. 여러 표준들에서 취하고 버려서 나의 표준을 만드는 것이 "사고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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