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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리적 행위와 심리적 행위
    테크니컬 라이팅 2021. 5. 3. 18:06

    카카오엔터프라이즈의 언어학 관점에서의 기술문서 가독성 향상 전략(tech.kakaoenterprise.com/100)이라는 글을 흥미롭게 읽었다. 내용이 흥미롭다기보다 접근 방식이 특이해 보인다. "어휘 위계"라든가 "복합 명제" 같은 개념들이 테크니컬 라이팅을 난해한 것으로 보이게 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에 대해 몇 가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무료 요금제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일부 API 호출이 통제됩니다.

    이 예시에서 "통제"가 "허용하지 않음"과 "조종함"을 (애매하게)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로 교체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 올바른 지적이지만 저 문장을 잘못 이해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항상 달리 해석될 여지가 없도록 기계적으로 완벽한 문장으로 표현을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문장의 일부가 애매하거나 모호해도 독자들이 대부분 제대로 해석한다. 맥락(context)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 예에서 문장의 맥락을 결정짓는 것은 "무료 요금제"이다. 물론 내가, 나보다 덜 읽고 덜 쓰는 사람들에 비해,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하려 애쓰기 때문에 보다 잘 해석한다고 볼 수도 있다. 나도 때때로, 특히 바쁠 때, 남들이 보내온 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를 훑어보고 그 의도를 잘못 파악하곤 한다. 

    이따금 해석되지 않는 영어 문장을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 나도 외국인 친구에게 물어보곤 한다. 그러면 나도, 나의 외국인 친구도 똑같이 되묻는다. "앞의 문장들이 뭐야?" 대개 한 문장은 그 메시지의 맥락을 파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한 문장을 잘 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이 포함된 문단의 맥락을 뚜렷하게 하는 것이다. 맥락에 의존하지 않는 글을 시도해 보라. 글의 절반이 군더더기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중시하는 또 다른 규칙, "간결함"과 배치된다.

    "명제"란 판단을 표현하는 진술이다. 참 또는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문장이 명제이다. 글쓰기는 명제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다. 구나 절이 많이 포함된 문장이라 하면 될 것 같은데 왜 "복합명제 문장"이란 거창한 말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어는 영어와 달리 어순이 자유로운 언어"라는 주장은 진실에 가깝지 않다. 영어보다 약간 자유롭지만 굴절어, 특히 그리스어나 러시아어에 비하면 한국어는 어순이 거의 전혀 자유롭지 않은 언어이다. 아무 문장이나 하나 써 보라. 그리고 그 문장이 같은 뜻으로 이해되도록 어순을 바꾸어 보라. 기껏해야 부사의 위치만 바꿀 수 있다. 문장이 불명확한 이유는 어순이 무질서해서라기보다 주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어에서 주제어를 나타내는 조사 '은/는'"이라 언급한 것으로 보아, 글쓴이들이 "이중 주어"가 야기하는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어순에 연결한 것은 적절한 해법이 아니다. 이중 주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논하겠다.

    "통제 언어"에 대한 지침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스타일 가이드를 떠오르게 한다. 그것들보다 더 엄격한 스타일 가이드는 Aerospace and Defence Industries Association of Europe의 Simplified Technical English이다. 줄여서 ASD-STE100이라고 한다.  STE100은 동사구 사용을 혐오한다. STE100을 따르자면, 우리는 "켜다"의 의미로 "turn on"을 사용할 수 없고 "energize"를 사용해야 한다. 나는 STE100의 시도가 (맥락에 의지하지 않는 그래서 누구나 동일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기계적 문장 만들기라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것은 STE100이 개정될수록 그런 규칙들이 조금씩 완화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어려운 이유도 나중에 따로 논해 보겠다. 오래된 규칙들 중 일부는 폐기하거나 단서를 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인칭 주어를 사용하라"는 것은 영어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논쟁거리인데,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답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테마-레마"와 "topic and comment" 둘 중 하나만 쓰면 좋겠다. 이 대목에서 더불어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문장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동사이다. 

    I like you.
    I dislike you.

    매뉴얼에 포함된 문장의 유형들은 두 가지이다. 지시(instruction) 또는 묘사(desciption). 설명(explanation)은 묘사와 약간 다르다. 일반 사용 설명서의 대부분은 지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API 문서는 그 반대이려나? 지시문의 구조는 간단하다.

    목적(~하려면)과 방법(~해라)

    iOS8 매뉴얼을 보자.

    Turn iPhone on. Press and hold the Sleep/Wake button until the Apple logo appears.

    애플이 사용하는 약간 독특한 스타일인데, 이렇게 바꾸면 아주 전형적인 문장이 된다.

    To turn iPhone on, press and hold the ...

    "turn on"은 목적이고, "press and hold"는 방법이다. 흥미로운 것은 목적을 나타내는 동사는 심리적 행위이고, 방법을 나타내는 동사는 물리적 행위라는 것이다. 항상 그렇다. 우리가 무언가 "선택"해야 할 때 우리는 무언가 "클릭"하거나 "탭"하거나 눌러야 한다.

    "테마-레마"는 우리가 선택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이라기보다 주어 중심 언어의 특징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아마존에서 "technical writing"으로 검색하면 수백 가지 책들이 제시되는데, 왜 그 중 하나도 참고 문헌에 포함되지 않은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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