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매뉴얼에서 높임말
    테크니컬 라이팅 2021. 6. 2. 09:49

    공적 문서들이 격식 있는(formal) 언어로 작성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를테면 영어 문서에서 "Don't" 같은 축약을 쓰지 않아야 한다. 우리말에서도 "하였다"가 "했다"보다 더 정중하게 들린다. 이와 같은 규칙들은 사소하여 따르기 어렵지 않다. 나를 오래 동안 괴롭혔던 문제는 높임말이었다.

    다른 여러 언어들에서도, 이를테면 독일어에서 "du"와 "Sie" 같은, 경어법이 있다고 하나,  한국어와 일본어처럼 다양하고 정교한 높임 어미들을 갖고 있는 언어들은 없는 것 같다. 일본어는 한국어보다 덜 다양한 어미들을 갖고 있지만 대신 겸양어 표현들이 많다고 한다. 높임말을, 문서에서 사용해야 하는, 공적 언어로 간주할 수 있을까?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이정미 헌법재판관은 시종 높임말을 사용하였지만 주문(主文)만은 저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서류에 높임말을 사용하는 것을 꺼린다. 기안서나 품의서에서 흔히 쓰이는 어투는 "~임"과 "~함"이다.  "~이다"로 쓰면 불손해 보이고, "~입니다"로 쓰면 사적인 것처럼 들린다는 무의식적 고민 끝에 내린 어정쩡한 선택으로 보인다. (나는 차라리 "~입니다"와 "합니다"를 쓰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영부인을 한겨레가 "김정숙 씨"라 칭하여 논란이 인 적이 있다. 한겨레의 멍청한 해명이 이랬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08262.html#csidxa43bab351b3be2a8da45d17140f16a0

    사실 "씨"는 사전적 의미와 달리 점차 존칭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비판은 이런 언어 습관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氏"를 존칭으로 정의한 사전이 있었나? 내 기억에 "씨"가 높임말로 사용된 적이 없다. "씨"가 중립적인 호칭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에는 은행이나 병원 같은 곳에서 손님들을 "아무개님"이라고 부르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아무개 씨"라고 불렀다. 나는 그것이 당시에 직원들이 손님들을 더 높은 지위의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가 김영하가 말한 대로, 상대방의 정체나 신분을 알기 전에는 우리 언어가 그를 부를 호칭을 갖고 있지 않다. 지금은 경어 과잉 시대이다. "영화배우 송강호"가 아니라 "송강호 배우"라 부른다. 국어 사전에 "사람의 성이나 이름 다음에 쓰여 그 사람을 높이는 말"이라는 정의가 "님"에 추가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님"은 사람 이름에 붙여 쓸 수 있는 접미사가 아니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이름 뒤에 직업을 붙여 자신을 소개한다. "아무개 국회의원입니다", "아무개 변호사입니다", "모모신문 아무개 기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높이고 자신도 높인다.

    우리말에 중립적인 언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 시대는 각자의 계급이 뚜렷했으니 口語를 文語로 사용하는 것에 거북함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나이를 따지는 경향이 심화되었는지 모른다. 어떤 방식으로든 위와 아래를 정해야 마음이 편하다. 우리 언어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우리는, 동화책을 제외하고, 문서에 높임말도 낮춤말도 사용하지 않았었다. 요즘에는 높임말을 사용하는 책과 블로그들이 흔하다. 나는 그것이 작가가 독자와 맺기를 원하는 관계에 따라, 달리 말해 독자들을 집단으로 보느냐 아니면  개개인으로 보는냐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라 본다. 독자들을 공연장이나 시합장의 관중이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높임말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개개의 독자를 별개의 손님으로 간주한다면 높임말을 사용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친밀한 관계를 오래 유지하고픈 욕망이 클 것이다.

    일반 사용자 제품의 설명서는 예외 없이 높임말을 사용한다. 한때 나는 그것을 격식을 갖추지 못하고 사적인 것으로 비쳐지게 한다 여기어 못마땅해했다. 파는 자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용 제품의 설명서를 포함하여 다른 기술 문서에서도 높임말을 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나는 기업용 장비의 매뉴얼 작성에 높임말을 사용하지 않았고, 고객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매뉴얼에 높임말을 사용하지 않을 때 한 가지 사소하지 않은 문제가 생긴다. 매뉴얼에는 명령형을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어느 것이든 명령형 어미를 사용하는 순간 그 문장은 구어로 변해버린다.

    "~를 누르십시오."
    "~를 누르세요."
    "~를 눌러."
    "~를 눌러라."

    대안은 흡족하지 않지만 평서형을 사용하는 것이다.

    "~를 누른다."

    애매하거나 모호하게 들리는 경우가 생각보다 별로 없는 것 같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