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프래그머티즘, 아카넷, 2002
오래 전에 철학을 전공한 친구가 말하길 내가 물리주의적 논리실증주의적 실용주의자란다. 깊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럴 듯해 보여 그 뒤로 내가 스스로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나를 두고 논리실증주의적 실용주의적 물리주의자라고 말했다면 내가 물리주의자라고 믿었을 터이다. 지적 호기심보다 친하게 어울려 지내던 이들이 철학도였기 때문에 철학에 자연스레 흥미를 갖게 되었다. 한 학기에 꼭 한두 과목의 철학 강좌를 들었고 대체로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졸업할 무렵이 되자 철학이 어이없이 끝나버리는 소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 철학만큼 학문스럽지 못한 학문이 있을까? 그래서 실용주의가 무엇인지 구태여 깊이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학교에 다닐 때 프래그머티즘을 언급하는 이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지 새삼 의아스럽다. 프래그머티즘을 공부한 선생님들이 없었기 때문일 터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이 가장 흔했다. 그 다음으로 칸트, 훗설, 비트겐슈타인이 인기있는 철학자들이었던 것 같다.
내가 스스로를 프래그머티스트라고 생각한다면 해설서라도 하나 읽어두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 이 책을 샀다. 참 재미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해설서를 읽은 적이 없다. 철학 수업에서 플라톤이나 로크를 읽었지 그들의 해설서를 읽지 않았다.
재미없어서 드문드문 읽었지만 그 친구가 왜 나를 가리켜 실용주의자라고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 나의 예상과 크게 다른 점은 프래그머티즘 철학자들이 나만큼 과학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오늘날 과학으로부터 입은 혜택이 얼마나 큰지 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마음에 드는 몇몇 구절들을 나중에 인용하려 그 구절들이 있는 쪽들을 접어두었으나 여기에 옮겨 적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은 탓이다. 한 구절만 옮겨보겠다.
철학이나 인간의 이성이 자연의 거울이 아니고, 또 진리 개념이 단지 근대의 철학자들이 지어낸 허구적인 형이상학에 근거한 부질없는 강박관념의 산물이요, 그리고 세계라는 개념도 잘 잃어버린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 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는 무엇이며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로티의 대답은 "탈철학의 시대" 가 도래한다는 것이며, 그때 철학은 곧 문예 비평이다. 문예 비평은 언어 활동에 대한 비판 활동 일체이며 언어의 遍在性을 수용하는 로티의 입장에서 언어 비판은 곧 문화 비판이므로, 그가 말하는 문예 비평은 넓은 의미의 문화비판이다. (274 쪽)
탈철학의 시대. 지금 우리의 시대가 그러하지 않은가?
프래그머티즘 철학자들이 가졌던 고민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아주 깊이 따지지 않고 말하자면 그들의 주장들은 상식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 신념이 참이나 거짓임에 따라 이 세계에 무슨 특별한 차이가 벌어질 것인가?
영구불변한 진리가 존재한다고 그들이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한다. 그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가, 그것이 중요하다.
철학, 그것은 안목만 있고 창작의 능력을 갖지 못한 살리에르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