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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파친코를 읽고: 집단 의식에 대하여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2021. 6. 1. 12:22

    3 주만에 5백 페이지가 넘는 Pachinko를 다 읽었다. 이것이 내게는 대단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영어로 된 책을 한 달 안에 끝낸 적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Cosmos 같은 어려운 책은 말할 것도 없고, 깊이 매료되었던 Revenant도 마치기까지 두세 달 넘게 걸린 것으로 기억한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TV 드라마에 빠진 할머니들이 하듯이,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아내에게 선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들려줬다. 영화광이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하는 것과 같은 추측을 파친코는 허용하지 않는다. 선자가 고 한수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파친코 표지에 실린 여러 언론의 찬사들 중 내가 가장 공감하는 것은, 번역본에는 실리지 않은 것 같은데, 이것이다.

    과장 광고가 사라지고 겉표지에 흩어져 있는 친구들의 과잉 칭찬이 잊혀진 지 한참 뒤에도 오래 살아남는 걸출한 몇몇 소설들이 해마다 있다.

    파친코는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한다. 앞으로 그 생각들에 대해 되는 대로 거듭 써 보려 한다.

    아이폰이 등장한 무렵에 스티브 잡스와 더불어 손 정의가 큰 주목을 받았다. 손 정의 전기가 여럿 나왔었다. 그 중 하나를 사서 읽었는데,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의 집이 가난했던 것으로 묘사되는데 어떻게 고등학생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을까? 손 정의가 1957년에 태어났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손 정의의 아버지는 여러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하는데, 그 중 하나가 파친코이다. 손 정의 전기가 그를 신화적 서사로 꾸미고자 그의 배경을 일부러 빠뜨린 게 아닐까 싶다.  선자의 손자 솔로몬이 손 정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모자수가, 손 정의의 아버지처럼, 파친코로 부자가 되고 솔로몬을 미국 대학에 보낸다. 

    이 소설에는 일본인들이 재일 조선인들을, 욕하거나 때리는 것과 같은, 학대하고 핍박하는 장면의 묘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사의 형태로 전달되는 가장 잔인한 말들은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한 조선인 소년의 졸업 앨범에 일본인 동급생들이 남긴 글들이다. 친구들끼리 서로의 졸업 앨범에 덕담을 남기는 관행이 있었나 보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그와 같은 사건을 텔레비젼 뉴스가 며칠 동안 보도한 적이 있다. 심지어 몇몇 단체에서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다.

    노아처럼 똑똑한 조선인들이 겪은 시련은 기품있는 일본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리적인 폭력보다 sarcasm에 가까웠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破門당한 사람들과 같았다.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집을 구할 수 없었다. 놀랍게도 많은 조선인들이 집 안에서 돼지를 키웠다. 방 한 칸이 돼지 우리였다는 뜻이다. 일본인들은 당연히 조선인들이 더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서도 돼지를 집 안에서 키운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로마 시대에 초기 기독교도들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박해를 받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여러 신들을 믿었고, 그 조각상들은 흔한 기념 상품이었다. 우상 숭배를 금하는 교리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어떤 공직도 마다해야 했고, 조각상에 관련된 일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파문시킨 셈이었다. 파문, 그 집단적 따돌림은 온전한 주거, 온전한 교육, 온전한 직업 그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파문은 일본인들도 겪는다. 장애인 동생을 둔, 모자수의 친구 하루키와 그의 어머니,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한 에츠코와 그의 딸 하나.

    많은 일본인들이, 사실이 어떠하든, 파친코를 야쿠자가 하는 사업으로 생각한다. 야쿠자는 조선인을 고용하기도 한다. 일본인들이 파친코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部落民, 그러니까 백정이나 망나니 같은 천민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느꼈다. 와세다 대학까지 간 노아도, 콜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솔로몬도 결국 택하는 일이 파친코이다.

    우리가 재일 조선인들에게 물을 법한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왜 돌아오지 않으셨나요? 선자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다. "전에는 이쪽에서 벌이는 전쟁 때문에, 그 다음에는 저쪽에서 벌어진 전쟁 때문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쪽의 전쟁은 이차 세계 대전이고, 저쪽의 전쟁은 한국 전쟁이다. 게다가 하나였던 모국이 별안간 둘로 나뉘었고, 어느 한 쪽을 국적으로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다. 뭐 이런 거지 같은 조국이 있나?

    왜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으셨나요? 멍청하게도 이 질문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다. 곤경을 덜고자 자신을 핍박하던 원수의 국민이 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일본인들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본은 우월하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일본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특히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교육을 받았다. 조선인들은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기피했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비인도적 행위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지 않다. 미국인인, 솔로몬의 여자친구 피비가 일본을 비난하자, 솔로몬은 아이러니하게도 히로시마와 (이차 대전 중에 미국 정부가 일본인들을 감금한) 수용소를 언급한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의식이 그 사회를 어떻게 만드는지 이 소설에서 발견한 것 같다. 일본인들은 전쟁 피해자이고 그들에게 반성할 일도 사죄할 일도 없다. 지금은 동성애를, 타자의 관점에서, 개인 취향쯤으로 여기지만 대학생일 때 나는, 다른 많은 친구들도, 게이를 혐오했다. 희한하게도 남자들은 게이를, 여자들은 레즈비언을 더 싫어한 것 같다. 내가 게이를 혐오하는 감정이 어떤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내가 이 소설에서 발견한 한 가지 교훈은 근거 없는 어떤 감정이나 믿음이 집단적으로 유지될 때 그것이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우파가 절대 다수라면,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제일 원칙이니까, 나는 그런 상황을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좌파나 우파보다 중도파가 더 많은데, 정치적 신념이 덜 확고한 그들이 우리의 정치 지형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나는 중도파가 개개의 현안에 대해 서로 다른 그러나 확고한 견해를 갖고 있는 계층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각각의 문제에 서로 모순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것은 생각이 없거나 이익만 중시하는 것뿐이다. 인간과 동물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인간들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일관성 있는 생각을 견지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계속 성찰해야 한다. 일본인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일본어판 파친코가 2020년 7월에 발간되었다. 얼마나 많은 일본인들이 읽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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