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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대에서 한계령까지산행 2024. 11. 4. 10:03
단풍을 기대하고 장수대를 찾지 않았다. 거리가 대략 13 킬로미터라고 하니, 걸을 만하리라 싶었고, 너덜길이 어떠한지 궁금하기도 했다. 날이 흐렸다. 오를수록 안개가 짙어졌다.
대승령에 먼저 도착한 일흔을 넘긴 듯한 분이 내게 물었다.
"어디로 가세요?"
"한계령이요. 남교리로 가세요?"
"네, 양양에 비가 온다고 해서."
아이폰의 날씨 앱이 오전에 한 시간 가량 5 밀리미터 정도의 비를 예상했다. 설악산 같은 높은 산 속에서의 날씨가 일기예보에 맞게 변하리라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다. 장수대로부터 몇 백 미터 위에서 본 풍경이 실은 지옥의 천사가 내게 고지한 것이 아닐까 싶다.능선의 북쪽에서 부는 바람이 거셌지만 운무가, 한계령으로 내려올 때까지, 걷히지 않았다. 대승령을 지난 얼마 후에 내리기 시작한 가는 빗줄기가 잦아들기도 했지만 그칠 줄 몰랐다. 가볍다는 이유로 판초 우비를 가져온 것이 또 하나의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지팡이를 쓰기가 불편했고, 간혹 강한 바람이 우비를 뒤집어놓기도 했다.
아직 춥지 않아 등산객이 적지 않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한계령까지, 대승령에서 만난 노인을 포함하여, 고작 네 사람과 마주쳤다. 수 년 전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자오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이 행성에 홀로 존재하는 듯한 고립무원의 적막감이 밀려왔다. 외로움을 달래려 미친 놈처럼 목청껏 노래를 불러보았지만 숨이 차서 한 곡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드디어 너덜길을 만났다. 사진으로 본 것과 다르게 조금도 낭만적이지 않았다. 미끄러져 다칠까 두려워 지팡이를 접고 짐승처럼 기어 올랐다. 귀때기청봉을 앞뒤로 너덜길이 드문드문 이어지는데 다해서 일 킬로미터는 넘고, 이 킬로미터는 되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끝났겠지, 더 없겠지 하는 바람과 달리 너덜길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힘에 부쳐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너덜길은 또 다른 이유로 위험하다.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는 측량 막대 같은 봉들이 없으면, 특히 이런 운무 속에서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한계령삼거리에 이르러 비로소 안도했다. 한계령까지 내리막이니 수월하겠지만 아직 2.3 킬로미터가 남아있다. 간신히 한계령에 도착해서 아이폰을 꺼내들었다. 도중에 만난 이정표들이 보여준 거리를 합하자면 12.8 킬로미터이다. 물론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15 킬로미터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건강 앱이 보여준 거리는 19 킬로미터. 내가 좀 헤맸나 보다.
나는 공룡능선보다 더 힘든 코스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비 때문이 아니어도, 마른 날에도 서북 능선이 더 힘겨울 것 같다. 다시 찾을 엄두가 나지 않지만, 능선 양쪽으로 풍경이 어떠한지 궁금하여 미련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