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게 기타란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2025. 11. 11. 12:15
백 여사가 고맙게도 십이 년 전에 내게서 사간 기타를 돌려주었다. 흠집이 여럿 생긴 점을 제외하면 상태가 양호하여 기쁘다. 내가 기타를 잘 치게 되지 않을 것을 잘 안다. 고등학생 시절에 기타를 처음 접했다. 나의 기타 실력은 그 뒤로 좀처럼 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박치이기 때문이다. 박치인 까닭은, 음악적 재능을 차치하고, 아마도 음악을 즐겨 듣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느 사람들에 비해 내가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불혹을 넘겨 깨달았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데 기타에 능숙해질 리가 있겠나? 백 여사에게 기타를 넘긴 것이 그 즈음이다.
얼마 전에 불현듯 그 기타가 그리워졌다. 내가 좋아하는 곡들이 매우 적다는 것과 무관하게, 나는 클래식 기타의 소리를 사랑한다. 몇 달 전부터 음악 CD를 하나둘씩 사들이고 있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딥 퍼플, 퀸, 레드 제플린, 조지 윈스턴 등이다. 전에 듣던 그 CD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이것이 기억의 왜곡이다. 내가 그 CD들을 산 적이 없다. 내가 들었던 것들은 CD가 아니라 MP3나 Flac 파일들이었다. 좋아하는 음악의 범위가 좁으니 고급 오디오를 탐낼 만큼 음악이 내게 사치스러운 취미가 될 수 없다.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모든 음악을 외면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를 좀처럼 질리게 하지 않는 소수의 그 곡들을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으로 즐길 것이다.
대학 시절에 철학과 친구가 나를 두고 논리실증주의적 실용주의적 물리주의자라 하였다. 마흔을 넘기고 한참 뒤에야 그녀가 무슨 의미로 나를 실용주의자라 일컬었는지 깨달았다. 어떤 언명이 주어졌을 때, 나는 그것의 진위를 따지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이를테면 나는, AR과 VR을 포함하여, 동영상 매뉴얼이 가치있는 매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동영상이 제공하는 편익이 같은 시간과 비용으로 만들 수 있는 다른 매체의 편익보다 현저히 크지 않다면 그것을 가치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용주의자적 판단이다.
지식에서든 방법에서든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들을 마다한 적이 거의 없다. 나보다 또는 나만큼 경력 있는 동료들이 없었기 때문에 달리 떠넘길 대상이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못 하겠다" 말하는 것이 명예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품이나 장비에 대해 배우는 것은 어느 프로젝트에서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새롭다 할 수 없지만, 의뢰인이 새로운 매체를 요구했을 때 그것을 익히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된다. 이를테면 깃허브에서 운용되는 지킬을 이용하여 안드로이드 기반의 POS 시스템에 대한 매뉴얼을 작성해야 했다. 지킬은 마크다운을 HTML로 변환하는 프로그램이다. 지킬에 대해 해박해질수록 더 쉬운 작업 방법을 찾아내겠지만, 지킬을 연구하는 데에 사나흘의 시간만 할애하기로 결정했다. 그 연구에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벌게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터리 코팅 장비를 맡았을 때, 배터리 소재와 원리에 대해 인터넷을 뒤져 공부했다. 매뉴얼을 작성하는 데에 적절한 정도의 지식이 얼마인지 말하기 쉽지 않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설명을 발견할 때까지 관련 지식을 추적한다. 대개 그것이 적당한 선이다.
프로그래밍에서 코드가 짧을수록 더 세련되어 보이지만, 그 우아함 이외에 달리 더 얻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달성하는 데에 들이는 시간은 낭비이다. 이것이 파워셸이나 파이선으로 코드를 작성할 때 나의 태도이다.
나는 실용주의자이다. 실용주의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기타를 즐기려 한다. 알함브라의 궁전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실용주의자는 할 수 없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라리아네의 축제를 자연스럽게 연주하게 된다면,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에게 CD란 (0) 2025.11.13 나에게 아름다움이란 (0) 2025.11.11 나에게 명령행이란 (0) 2025.11.06 A Brief History of Intelligence (4) 2025.07.28 Invisible China (0) 2025.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