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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아름다움이란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2025. 11. 11. 16:51
이 글이 "나에게" 시리즈(https://hoze.tistory.com/2273, https://hoze.tistory.com/2274)의 마지막이다. 나는 화려한 것들보다 깔끔한 것들을 좋아한다. 연장 따위를 고를 때 응용 범위, 사용 빈도, 내구성 등이 우선 고려 사항이다. 디자인은 실용주의자에게 가장 덜 중요한 요소이다. 쓸모가 전혀 없는 나침반이나 유리 구슬을 고를 때에 비로소 미학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나의 이런 실용주의적 성향 때문에 나는 오래 동안 스스로를 미니멀리스트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게 내가 나의, 분명하지 않은, 미적 기준에 집착하고 있음을 최근에 깨달았다. 스크립트를 작성할 때 나는 변수나 함수 이름을 허투루 짓지 않는다. 이름이 유의미해야, 가급적 그 용도나 목적을 암시해야 나중에 코드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럴듯한 이유도 있지만, 나머지 이유는 결벽증이 아닌가 싶다. 문서처럼 소스 코드도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 소스 코드가 아름답다. 소스 코드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은 처리 속도 못지않게 내게 중요하다. 레이텍으로 페이지들을 조판할 때, 어떤 장식도, 이를테면 절 제목의 밑줄 같은 것들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그 효용성을 나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 없으면 군더더기일 뿐이다. 반면, 색인이 필요하다 생각되면, 매우 번잡한 작업임에도, 색인을 만든다.
나는, 결벽증으로 보일 만큼, 간결함과 일관성에 집착한다. 미니멀리즘이나 실용주의적 성향만으로는 나의 모든 미적 가치 판단을 설명하기 어렵다. 내가 만든 매뉴얼은 정보의 구성과 수준에서부터 어휘의 적절성, 판면 배치, 삽화의 가독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점에서, 그리고 그 기획과 진행 과정의 각 단계조차 아름다워야 한다. 물론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을 성공적으로 만든 적은 아직까지 없다. 혼자서 완벽한 것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부족한 진득함을 메우기 위해 빨리 해치울 수 있는 꼼수들을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나의 실용주의적 성향이, 나의 모호한 미학과 더불어, 할 수 있는 방법과 범위를 빨리 결정하고 나를 밀어부쳤다. 이 세 가지가 한 직업인으로서의 나를 만들었다. 그 중에 나를 추동한 것은 나의 미학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아름답지 않은 일은 기피하려 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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