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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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오브 더 씨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2020. 10. 20. 15:00
나는 TV 시리즈를 좋아하지 않는다. "킹덤" 같은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 미로 같은 노선을 따라 달리는 시내버스 같아서 지루하다. 그래서 넷플릭스에서 영화 목록만 훑어보는데, 세 가지로 추릴 수 있다. 재미있지만 내가 이미 오래 전에 극장에서 본 영화, 흥행하지 못한 극장 영화, 그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흥행하지 못한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흥행에 실패한 영화를 부러 볼 필요가 없다.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넷플릭스 영화들은 기껏해야 범작이고, 대개 쓰레기이다. 상영관이 아닌, TV가 갖는 물리적 한계 탓인지, 걸작이라 일컬을 만한 작품이 내 기억에 없다. 그래서 항상 큰 기대를 갖지 않고 넷플릭스를 뒤진다. "하트 오브 더 씨"가 넷플릭스 영화 목록에 올라온 것은 오래 되었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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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속성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2020. 4. 22. 11:54
칼에 베었을 때 겪는 고통이 칼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고통이 칼이 가진 속성 중 하나라 해야 할까? 그렇다면 고양이를 어루만지며 느끼는 흐뭇함은 고양이에게서 온 것이고 따라서 그 유쾌함이 고양이의 속성이라 해야 할까? 그렇다면 고양이를 쓰다듬으면 누구나 즐거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경외하지만 개나 고양이와 같이 살고 싶지는 않다. 음악이 주는 즐거움을 오롯이 음악이 갖고있는 게 아니다. 음악에서 기쁨을 느끼는 기질을 결여한 나에게 그것이 내게 주는 행복은 시시하다. 무언가 광적으로 좋아했던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흥분으로 채워진 순간들도 내 기억에서 찾기 어렵다. 아무 재능도 없어서 아무 것도 좋아하지 않았는지, 아무 것도 좋아하지 않으니 아무 것도 익히려 애쓰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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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ve Speaker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2020. 2. 26. 09:56
한국계 미국인 이창래가 지은 소설이다. 이 소설로 헤밍웨이 재단의 상을 받았다고 한다. 가볍게 읽을 수 있기를 바랬는데, 이 책은 내가 이제까지 읽어본 그 어떤 책보다도 난해했다. 작가는 영어 사전에 포함된 모든 단어를 적어도 한 번은 사용하자고 작정한 것 같다. 처음 보는 단어들이 난무하는데다 문장들이 길다. 단순히 익숙하지 않은 구어체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조차 모를 만큼 그의 표현은 내게 아주 낯설다. The Revenant도 이 책만큼 난해하지는 않았다. 내용이 흥미로우면 사전 찾기의 고역을 참을 수 있다. 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이 그랬다. 소설은 줄거리가 뚜렷해야 한다. 그래야 재미있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주인공의 아버지 이야기, 아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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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체르노빌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2020. 2. 24. 16:24
사고 수습을 지휘하는 핵물리학자 발레리 레가소프가 말한다. "이것은 마치 히로시마에 떨어진 것의 두 배가 되는 핵폭탄이 매일 터지는 것과 같습니다." 원자로 아래에 있는 탱크를 비우기 위해 수문을 여는 작업에, 방사능 피폭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지원한 세 명 덕분에 발생할 수 있었던 추가 폭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머지 원자로 세 기가 모두 폭발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 주변에 있던 나라들, 벨라루스, 키예프, 리투아니아,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심지어 동독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히로시마 급의 핵폭탄 1600 개가 터진 셈이니 회복하기 어려운 재앙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고는, 기술적인 것은 잘 이해되지 않지만, 제어봉 끝에 흑연이 달려있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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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슬람교도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가?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2020. 1. 28. 16:06
힌두교도들이 소고기를 먹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소를 신성한 동물로 여기기 때문이고, 이슬람교도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까닭은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자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불결하다"는 게 무슨 뜻일까? 종교적인 게 아니라 물리적인 상태를 의미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창자도 먹지 않는가? 이 글이 소개하는 설명이 설득력있다. 유대교도 돼지고기를 금지하는지 몰랐다. 두 종교의 공통점은 중동, 즉 덥고 건조한 기후에서 발원했다는 것이다. 돼지는 땀을 흘리지 않기 때문에 진흙을 묻혀 체온을 식히는데, 그런 지역에서는 진흙이 없으니 자신의 분뇨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돼지뿐만 아니라 뭐든 가두어 기르면 똥칠을 하게 마련이니 이게 이유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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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2019. 11. 18. 11:52
이 책은 아주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모아 일인칭 구어로 이야기한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맥락이나 배경을 짚어내기가 쉽지 않다. 다 읽지 못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첫 이야기 "기억의 이유"를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젊은 소방관 아내의 이야기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사고 현장에 투입되었던 소방관들은 열나흘 안에 모두 죽었다. 많은 군인들도 투입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죽거나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다. 죽기 전에 그들이 겪는 고통은 참담하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키르키스스탄에서 내전과 같은 인종 분쟁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스스로를 러시아인이 아니라 소련인이라 생각하는 타지크인들이 죽음의 공포를 피해 체르노빌로 들어왔다. 미친 짓 같지만, 체르노빌에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체르노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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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깊다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2019. 10. 29. 09:38
전우용 선생이 2008년에 낸 책이다. (돌베개) 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을 읽는 데에 지쳐서 오랜만에 우리말로 된 책을 가볍게 읽어보자는 심산으로 이 책을 골랐는데 전혀 가볍지 않다. 들어보지 못한 한자어 표현이 많아 사전이 필요하다. 이 책 하나로 서울의 오랜 사정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없겠으나 도시로서의 서울이 갖는 여러 특징들과 종각이나 광장 시장 등 여러 시설의 연유를 알게 된 것은 내게 작지 않은 수확이다. '합쇼', '땅거지', '똥개', '가게', '인구', '질환' 등 말에 관련된 설명이, 특히 언어에 큰 관심을 둔 내게, 아주 흥미롭다. 누구에게나 권해볼 만한 '깊이' 있는 인문서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이제까지 읽은 책들 가운데 한국인이..